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틈 그리고 튼튼함

2023. 8. 26. 17:29

대학 때 농활을 갔다가 작은 사찰에 들어간 적이 있다. 마당 한 가운데 석탑 하나가 기운을 뽐내며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.

난 탑 주변을 빙빙 돌며, 돌에 새겨진 상처와 흔적을 살폈다. 얼핏봐도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 석탑이었다. 세월과 비바람을 견딘 흔적이 여력했다.

‘몇 살쯤 됐을까?’ ‘얼마나 오랜 세월동안…’ 혼자 조용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찰나,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.

“얼마나 됐을 것 갔냐?”

주지 스님인 듯했다. 그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마주치는 옆집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듯 편안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.

“이곳에 있는 석물은 수백 년 이상 된 것들이 대부분이야. 참, 이런 탑들을 만들 땐 묘한 틈을 줘야 해”

“네? 틈이라고 하셨나요?”

“그래, 탑이 너무 빽빽하거나 오밀조밀하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앉아. 어디 탑만 그러겠냐. 뭐든 틈이 있어야 튼튼한 법이지…”

스님이 들려준 설명이 건축학적으로 타당한지는 잘 모르겠으나, 그 이야기를 듣자마 그동안 내 삶에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던 감정과 관계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. 돌이켜보니 지나치게 완벽을 기하는 과정에서 중심을 읽고 넘어지게 만든 대상이 셀 수 없이 많았던 것 같다.
틈은 중요하다.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. 다만 틈을 만드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,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.


이기주_ 《언어의 온도》中